3

"박창이 어디 있나."


철컹.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렸다. 박 서방의 머리에 정확히 총구를 겨눈 도원은 그를 집어 삼킬 듯이 노려봤다. 박도원이 이렇게 평정을 잃은 적은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어서 박 서방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진해야 하나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온 거냐고. 박 서방은 스스로의 운 없음을 탓했다. 그저 여느 때처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새로 들어온 도박은 항상 하던 마작보다 더 재미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한 탕 하기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박창이가 어디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함부로 불수는 없었다. 마적 떼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이승과는 영원히 인사를 고해야 한다. 더구나 상대는 박창이었다. 만주 최강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온 그. 온 몸 성한 곳 없이 돌아왔지만,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다시 이 뒷골목 세계를 접수한 놈이었다.

그렇지만 박도원은 무서웠다. 박창이와 같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그랬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것은 박창이와 매한가지였다. 박서방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타앙-

박서방의 귓가를 스쳐 총알이 바닥에 박혔다. 박 서방의 귀에서는 시뻘건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몹시 쓰라렸다. 그렇지만 박 서방은 아픈 기색도 함부로 내비칠 수 없었다.


"머리 굴리는 수작 뻔히 보인다. 빨리 얘기하지 않으면 네 목숨이 위태로워."


그리고 총신의 끝이 박 서방의 이마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알았어! 알았다구!"


결국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박 서방이었다.





요 근래 두목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전에 두목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배려? 박창이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 두목은 미끼라고 잡고 있는 인질에게 배려를 하고 있다.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의 불안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창이는 잔뜩 성이 난 짐승이었다. 피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당연한, 아니, 그 모습이 어떤 순간보다도 아름다운 사내였다.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 그 모습에 반해 쌍칼은 창이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했다. 창이는 예상외로 쉽게 승낙했다. 그는 추앙받기를 원했다. '최고'란 말에 집착했다. 의외의 모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변해버린 모습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찌 변했던지 두목은 두목이었다. 쌍칼은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절대로 그를 배신하는 일은 없으리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약조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을 덮여놓고 창이의 방 앞에서 기다렸다. 노크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창이는 약간 피로가 섞인 눈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쌍칼을 보던 창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목욕물을-"


아, 창이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집- 아니, 꼬마. 목욕시켜"


네? 라고 반문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창이는 그런 쌍칼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천하의 박창이가 자신이 인정하는 부하에게 인질의 목욕을 맡기다니-. 이것은 창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는 창이가 자신의 신념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워서 난감했다. 아무리 변해간다고 하지만, 이렇게 쉽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두목이 시킨 일은 시킨 일이었다. 쌍칼은 쭉 걸어서 송이의 방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축축해진 손바닥에 쇠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은 유쾌하지 못했다.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느낀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었지만, 쌍칼은 심호흡으로 자신을 달래었다. 고기를 잡고 그대로 앞으로 밀자 문이 열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웅크려 자고 있는 송이에게 쏟아졌다. 조그만 몸을 안쓰럽게 말고 있다. 그제야 이 방이 결코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춥다는 것에 가까웠다. 쌍칼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불찰을 꾸짖고 송이에게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대니 심하지는 않았으나 열이 있었다.


“일어나라”


몸을 흔들며 깨워도 송이는 좀체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더욱 웅크렸을 뿐이었다.


“으……”


신음소리를 작게 내뱉으면서 말이다. 쌍칼은 한숨을 내쉬고 더욱 크게 송이의 몸을 흔들었다. 그때, 송이의 눈에서 시작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쌍칼은 당연히 굳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있었다.


“엄마…….”


소녀는 아기 새가 어미 새를 찾듯이 상대를 애타게 불렀다. 그 소리는 울음소리보다도 훨씬 더 구슬펐다. 우습게도 마음이 찡해졌다. 그녀는 강해보였다. 자신에게 당당히 칼을 겨눈 점이나, 무엇인가를 지켜내겠다고 바득바득 외치는 것이 그랬다. 그러나 쌍칼은 기억 했다.

‘죽지 말아요.’

눈에 걱정을 담아서 따뜻하게 말해주었다. 맞잡은 손에 온기가 밀려들어왔다. 그 따뜻함은 흘러 흘러 쌍칼의 모든 것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그 말이 없었다면 사실,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과연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생애 처음으로 받은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그리 따스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생판 남인, 아니 적에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쌍칼은 그 애틋한 그리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아주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한글을 깨치기 전에 검을 잡은 이유도 그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나 이내 쌍칼의 얼굴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약해지면 안 된다. 나약한 종자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으니.

그렇지만 섣불리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아도 송이의 모습을 보면 약해지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쌍칼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식은땀 때문에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있었다. 언뜻 스치는 피부사이로 열이 전달되었다. 왠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심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가벼운 고뿔이라 해도 위험한 병으로 언제든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 즉시 그녀를 깨웠다.


"아……아?"


송이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인상을 썼다. 눈을 찡그린 체 앞을 보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 와중에 온 몸으로 퍼지는 생리통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말이다. 한기가 갑자기 들었다. 일어나기 싫었다. 그러나 송이는 제 분수를 결코 잊지는 않았다.


"물을 덥혀 놨다. 씻어라."

"네?"


다시 물어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을 덥혀 놓았다구? 송이는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천하의 박창이가 나쁜 새끼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사람을 삶아먹는다고 소문이 나진 않았다. 사람을 먹게 생기지는 않았는데…….


"저기 나 맛없는데……."


순식간에 쌍칼의 표정이 냉담해졌다. 무표정한 사람의 얼굴이 더 굳을 수 있다는 것을 송이는 처음 알았다. 송이는 무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걷기 힘든가?"


갑작스런 쌍칼의 질문에 송이는 네? 네……좀……. 이라는 바보 같은 답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어딜 가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깨끗하게 씻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행복한 일이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고문이었다. 쌍칼은 그런 송이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안아 들었다.

즉, 공주님 안기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 것이다.

순식간에 쌍칼의 품에 쏙 안긴 송이는 어쩔 줄 몰라 통증도 잊고 바둥거렸다.


"이, 이봐요. 내려줘요!"


그러나 쌍칼은 묵묵하게 그녀를 안고 물이 담겨있는 방으로 갈 뿐이었다. 송이는 이내 제풀에 지쳐 저항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거리도 길지 않고……. 이따금 흔들림에 아프긴 했으나 좋은 운송수단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방에 도착하자 더운 김 덕에 시야가 뿌예졌다. 욕탕 앞에 송이를 내려놓은 쌍칼은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뭐, 뭐하는 거예요!"


단박에 그의 손을 거절한 송이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큰소리를 쳤다. 쌍칼은 그녀의 불같은 반응에도 별 감흥이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송이의 얼굴이 그저 잘 익은 고구마 같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옷을 입고 씻을 건가?"


무뚝뚝한 그의 말에 송이는 그건 아니지만……. 이라고 기가 죽어 말했다. 쌍칼은 의기양양해진 표정이었다.


"그, 그래도 내가 씻으면 되잖아요."


송이도 지지 않았다. 쌍칼은 좋다, 라고 무뚝뚝하게 이야기 했다.


"저기 문가에 가서 뒤돌아 계세요."


쌍칼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했다. 사실 그도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여자는 진실로 처음이었다. 여태 만난 여자들이 몸을 파는 창부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문 앞에 앉아있으니 시야가 고정되었고, 자연스럽게 청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에 쌍칼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일부러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곧 소녀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아저씨. 이리 좀 와봐요."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지르던 소녀가 어떤 심산으로 부르는지는 몰랐다.


"왜."

"그냥요. 빨리 와보세요. 중요한 일이예요."


중요하다고 하니 가볼까. 스스로 자기 변명을 마친 쌍칼은 조심스럽게 송이에게 다가갔다. 희뿌연 연기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려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송이는 물통에 몸을 완벽히 밀착시켜 가리고 있었다. 안심된 기분과 동시에 왠지 모를 아쉬움과 섭섭함이 마음속에서 일렁여서 쌍칼은 스스로를 자책 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20살 남짓한 꼬맹이에게 무슨 마음을 품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인 건가."


송이는 그런 쌍칼에게 손짓을 해서 몸을 낮추게 만들었다. 쌍칼의 의문에도 그저 빨리 빨리를 외치는 송이의 막무가내에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자마자 송이는 빠르게 그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부드러움에 쌍칼은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까르르"


송이는 정말로 즐거운 듯이 실컷 웃었다. 쌍칼은 어안이 벙벙해 자신의 볼을 문지르며 송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돼버린 것이 모든 것을 까먹은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

"아저씨도 그런 표정 지을 줄 아시네요."


그런 모습이 더 멋있어요. 소녀는 솔직한 감상을 담아 햇살처럼 이야기 했다.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

그런 햇볕에 남자는 꼼짝없이 나른한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4

다 씻고 송이의 방으로 온 둘. 쌍칼은 자연스럽게 이불을 갈아주고 준비했던 사람처럼 미음을 건넸다. 인질치고는 지나치게 황송한 친절에 송이는 마음이 썩 편치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송이는 제법 날카롭게 이야기 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나……이런다고 마음 돌리지는 않아요."


절대로 도원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그건 절대적인 진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친혈육 만큼 중요했고, 왕과 같았으며 태양이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자신이 해바라기처럼 튀거나 아름답지는 못할지 몰랐지만 들판의 한 송이 꽃마저 태양 없이는 죽어버릴 터였다.


"별로……그런 의도는 아니다."


쌍칼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사실 진심으로 어떤 의도를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사실 쌍칼의 스타일은 조근조근 설명하는 것보다는 창이처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합당했으니까. 더구나 연약한 목을 가지고 있는 이 소녀라면 언제든지 꺾는 것이 가능했다. 그 일전에는 분명 자신은 부상을 당한 상태여서 졌지만, 지금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쌍칼은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왜, 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쨌거나 쌍칼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송이는 맛있게 미음을 먹었다. 워낙 활동적인 소녀였고, 먹는 것만큼은 귀신 같이 지켰기에 아프다고 해서 미음을 못 먹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긴 머리의 가냘픈 아가씨가 해야만 올바른 행동이라고 믿었으니까. 미음 한 그릇을 뚝딱한 송이를 쌍칼은 조금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쌍칼은 송이에게 동그랗고 하얀 물체를 준다.


"뭐예요?"

"약이다. 양놈들은 이런 걸 먹는다더군."


생전 처음 보는 알약에 송이는 신기해하면서 들여다봤다. 한약도 제대로 구경 못하고 큰 송이였다. 아파도 자연스럽게 낫기만을 바라야 했다. 그것이 조선에서 부모 잃은 고아가 겪어야 하는 고초였다. 상념에 빠져있던 송이는 쌍칼의 재촉에 단숨에 약을 털어 넣었다. 송이가 자연스럽게 씹기 직전에 쌍칼은 물을 건네서 꿀꺽 삼켜야 한다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힘겹게 다 넘기긴 했는데, 아직 입안에는 씁쓸한 기운이 남아있다. 콧등을 찡그리며 인상을 쓰자 쌍칼은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화에 송이는 궁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전 우연히 얻었다."


그 기색에 변명이라도 하듯 쌍칼이 말을 내뱉었다. 송이는 흐음……. 하며 못 믿는 구석이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뭐, 사탕은 맛있는 거고 그것을 자신한테 준 것이 아닌가? 송이는 사탕을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아주 맛있었다. 이렇게 단 것은 아주 오랜만에 먹어보았다. 어릴 때 이후 이에 좋지 않다며 도원은 잘 사주지 않았다.

도원 오라버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이제 볼 일 없는
사람. 항상 제멋대로고 귀찮은 심부름도 자주 시켰지만, 장 보러 갈 때마다 꼭 송이의 선물을 사갖고 오던 오빠였다. 이처럼 송이가 아플 때에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보고 싶었다.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뚝 그치라고 호되게 뭐라 할 터이지만, 분명 그 큰 손으로 자신의 등을 토닥거려 줄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의 세계로 들어 간 소녀에게 쌍칼은 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음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갈 따름이었다.






"쌍칼"


어둠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주인은 개를 부른다. 절대적인 공포 같기도 하고, 한낱 암괭이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섣불리 방심하면 안 된다. 그 순간에는 분명 자신의 세상이 무너져버릴 테니까. 쌍칼은 속으로 조용히 침을 삼키고 창이의 앞에 나타났다. 창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긴 하지만, 그것은 객기에 가까웠다. 다행히 창이는 그런 쌍칼의 예법에 별로 신경을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계집은 괜찮은가?"


위스키와 얼음이 조화롭게 담긴 유리컵을 습관처럼 뱅뱅 돌리며 창이는 물었다. 쌍칼을 힐끔 쳐다본 것을 제외하고는 그 유리잔에 시선이 모두 가 있었기에 정말로 궁금한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하긴 그것은 어차피 상관없는 문제였다. 현재 쌍칼은 개였다. 주인의 말에는 무조건 따라야하는 개.


"네. 별달리 아픈 기색은 없습니다."


확실히 송이는 많이 호전되었다. 마법의 기간이 끝난 탓도 있고, 감기도 쌍칼의 보살핌 덕에 많이 나았다. 그깟 계집에게 뭐 그리 동정심을 가질 필요가 있냐고 생각 되면서도 이상스럽게 챙겨주고 싶은 아이였다. 죽은 누이가 생각나서 일까. 별로 닮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아마 그 누이가 컸으면 딱 송이만할 것이다. 훨씬 예뻤겠지만. 그런 연유든 아니든 어쨌거나 쌍칼은 송이가 조금 각별했다.

그렇기에 지금 창이의 질문이 조금은 걱정되었다.


"흐음, 그래?"


창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자신을 보고만 있는 쌍칼에게 조금 짜증스럽게 말을 던지고서.


"뭐해. 그 계집 보러간다."


쌍칼은 자신이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안 되길 바라면서 창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깐 졸던 송이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막 도원과 만나고 있었다. 그는 엉엉 우는 송이에게 엄하게 그치라고 말했으면서도 자신의 품에 안겨주어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꿈이 아니기를 빌고, 간절히 빌었는데 역시 꿈은 그저 꿈이었을 따름이었다. 차라리 지금 박창이의 얼굴을 보는 이 현실이 꿈이길 바랐지만,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소원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괜찮아 보이는군."


무뚝뚝한 창이의 말에 송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벽으로 슬금슬금 물러났을 뿐이었다.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지만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창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움직이지 않던 엄마가 환영처럼 떠올랐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체로 눈을 감고 있던 엄마. 그때는 송이를 봐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는데⋯⋯당신을 데려간 것 같은 말의 울음소리가 미웠는데, 이제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밉다. 이제 별로 남지도 않은 자신의 것을 이 남자는 계속 가져가려고 한다.


"얼마나⋯⋯더⋯가져가야 해요?"


송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항상 씩씩하고 남자 같던 아이도 이 순간만큼은 어느 여자보다 더 여린 소녀가 되었다. 그렇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창이 앞에서 울 수는 없다. 입술이 터지더라도 꽉 물고 그렇게 버텨내야 한다.
그때 창이가 날카로운 나이프를 벽에 찍으며 으르렁 거렸다.


"한번만 더 이상한 소리를 했다간 그 혀를 잘라주지."


"차라리 죽이시지 그래요⋯⋯? 나한테 뭘 더 갖고 갈 바에는 죽이란 말이야!!"


송이의 울음이 터진 것과 창이의 나이프가 송이의 어깻죽지를 파고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혈관은 피해갔는지 송이의 어깨에서는 다행히 대량의 출혈은 없었다. 하지만 송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죽고 싶어?"


창이는 웃었다. 광기 어린 웃음은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해 더 소름이 끼쳤다.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이 남자는. 만약에 죽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죽일 남자.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말이다. 이 남자에게 자비나 동정심 따위는 없다. 그걸 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송이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서 다시 가족을 보고 싶었다. 최소한 도원과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 되도 상관은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들이 소중했으니까.


"나가 봐."


쌍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갔다. 그 걱정 어린 시선은 송이와 잠깐 마주쳤다. 그러나 송이는 지금 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 버거워 쌍칼의 걱정도 마음에 들어차지 않았다.
쌍칼이 문까지 닫자, 창이는 송이의 어깨에서 나이프를 뺐다. "읏" 송이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칼을 뽑자 피는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창이의 얼굴에도 튀었다. 살짝 피를 손으로 닦은 그는 다시 검게 웃었다. 혈향이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마약 같은 자극제. 순간 송이의 얼굴에 그녀가 어린다. 맑고 깨끗했던 그 얼굴. 항상 창이를 보고 웃어주던 그녀. 창이는 갑자기 송이를 당겨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으윽⋯⋯무슨⋯⋯."


창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송이의 옷을 벗기는 손길만 있을 뿐. 놀란 송이가 발버둥치자 얼굴을 소리 나게 쳤을 뿐이었다. 절대적으로 차이나는 완력에 송이는 완전히 반항할 기운을 잃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지금 이 순간 도원의 생각이 간절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간절했다. 그 큰 손을 잡고 싶다. 도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여기서 구해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없다.
별다른 전희도 없이 송이의 안을 점령한 창이는 무자비했다.


"선화⋯⋯선화야⋯⋯."


하지만 목소리만은 절박했다. 그 절박함에 송이는 아픔과 공포로 얼룩진 정신을 조금이나마 수습했다. 그제야 창이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창이는 울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눈가에 물이 고여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창이는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며 그렇게 울고 있었다. 갑자기 창이가 포악한 맹수가 아닌 상처 입은 작은 짐승처럼 느껴졌다. 송이는 저항의 손길을 멈추고 창이를 끌어안았다. 분명 자신이 동정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은 그 절박함에 보상받지 못했으니 다른 누군가는 충족 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창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송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짐승의 울음소리는 조금 잦아들었다.



+++

너무 늦었지만 이거 쓰는거 은근 재미있네요 ㅋㅋ 맛들렸다능 ㅋㅋ

모두 사랑합니다!

4편은 놈노말커플링동맹 지기분께 바치는겁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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